긴 하루의 시작

정말 잘 잤다는 느낌이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눈을 뜨고, 시계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정말 푹 잘잤다고 생각했다.

오전 3:35.
머리가 맑아지고, 온 몸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나는 내 몸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 뿐이다.
이제 나도 불혹의 나이로 진입했다. 하루 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때라 그러더라.

체력은 떨어지고, 사리 판단은 더더욱 힘들어지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 나이 20대의 고민이 40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그냥 생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아들이 커가고 있다. 어제는 하나남은 유치 앞니를 빼고, 해맑고 웃고 있었다. 이 녀석의 영구치가 나오면, 성장할 것이고 그리고 나는 내 영구치가 빠질 일만 남았다. 그래 그 녀석의 청춘이 나의 노년이 될 것이라고 입 버릇처럼 떠들었는데 현실은 나의 행복감과 바꾸어 버린 성장의 일부분이 되었다.

벌써 6시 7분이 지나고 있다.

오늘은 송도에 양재까지…

하루의 일정이 꽉 차있다.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뒤돌아 볼 여유도, 주위를 돌아볼 마음의 시간도 모자란 때이다.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배웠다. 새로운 문이 열렸으면 그 문 너머의 무언가가 있을지 호기심을 가져봐야 한다고 배웠다.
그 배움이 강요가 아니길 원하고, 나아가 그 호기심이 나의 발목을 잡을 장애물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결국 넘어야할 장애물이라면 기꺼이 넘어 가겠지만 그 장애물 자체가 벽이가 되어 내 앞을 막지 않길 바랄 뿐이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앞으로 해야할 일들은 반납할 장비 목록과 새로운 버전의 OS 테스트와 학생들을 위한 OS 설치 뿐이다.

2020년 1월의 첫 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무엇 하나 버릴 것도 그렇다고 간직할 이유도 없는 삶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내 삶을 두루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지나가 버린 2019년이었다.

정말 치열한 1년을 보냈다. 단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영역에서 그렇게 처음 걸음을 배우는 아이처럼 나는 내딛어야만 했다.

다행히 그 분은 나의 곁에서 나의 걸음을 기억하고 계셨고, 내가 앞으로 나아갈 때 마다 혹은 넘어질 때 마다 나 보다 앞서서 때로는 뒤에서 나를 붙잡아 주셨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였다. 그럼에도 나는 성장할 수 있었고, 그 성장이란 신체적 혹은 정서적 영역 안에 나는 오로지 권순길이라는 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아직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다. 고작 100살 기준으로 아직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인생이고, 누군가의 아들로 또는 남편으로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삶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오늘도 이른 새벽 부터 씻고, 출근길을 나설 뿐이다.

2020년 첫 글 부터 뭔 연민이나 아쉬움 또는 후회가 많은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시작이다.

벌써 15일이 지났지만 3개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궤도에 올랐다.

그래… 이게 다 그 분 덕분이다.
그렇게 나는 감사한 인생..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그 분 안에서만 설명되어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고맙습니다.

선택과 집중

간 밤의 꿈 속에서 내가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결과를 미리보기로 볼 수 있었다.
그 일은 마치 지금 현실에서 내가 고민하던 것을 반영하듯이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다.

결론이 내려진 일에 대해서 태도와 생각을 고치기는 너무 어렵다. 그러나 아직 그 일에 대해서 어떠한 결론이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언제든지 태도와 생각 그리고 다양한 토의와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것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

대부분은 결론을 내린 사람이 일방적으로 자신과 다른 결론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그의 태도와 생각을 바꾸기를 원하거나 강요하기 쉽상이고, 이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관계에 대한 신뢰는 깨지고, 지시와 강요, 의지와 상관없는 일장적인 선택만 존재할 뿐이다.

요즘 내 삶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도출된 결과를 가지고 논의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나 나의 직임이 나의 신분으로 작용하여 나보다 낮은 직임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과 사람사이의 갈등은 결국 있는 그대로의 시선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의 부재인것 같다. 그렇게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고, 그렇게 그 틀 안에서만 그 사람을 보려 한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관망하는 자세로 불필요한 감정 대립을 멈추고, 사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것이며 집중해야 할 것이다.

20180305

간밤의 꿈을 잃어버린 나는 방황하듯 홀로 울부짖는 늑대가 되었다.

현실이 부여한 어깨의 걱정과 근심 그리고 내 배 주위로 둘러싼 염려는 결코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멈추고 싶다.

이 시계를 멈추고 싶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멈추지 않는 수없이 많이 조각난 짧은 찰나의 순간 모두를 부숴버리고 나는 다시 기나긴 꿈속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그러나 멈춰지지 않는다.

아주 잠깐이라도 나의 의지와 바램과 소망이라 불리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오길 바라보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여전히 그 ?몽념에 갇혀 있는 것이다.

도망가고 싶다.

멈추고 싶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내게도 타인에게 넘겨준 배려와 용서 그리고 긍휼의 시선을 베푸는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나를 향한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일까?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부족한 것들 뿐이어서 나는 이 고통의 수레를 벗어나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의 인자하신 손길과 그분의 긍휼을 기다린 지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모른다.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을 하루하루 채워가지만 내가 기대하는 것과 그분의 바램은 너무나 다른 것으로만 보인다.

나는 확실히 갈 길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그 자리에 멈춰서 은혜를 구걸하는 거지가 되어야 할지 선택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나를 둘러싼 이 두려움의 저주를 비껴갈 방법을 모르겠다.

그저 눈물로 내 안에 새겨진 저주의 상처들을 하나하나 닦아 내려갈 뿐이다. 내게 주어진 이 상황과 상처들을 모두 끌어안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인가 보다.

밤은 깊어가고 낮이 밝아 오려 한다.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이지만 지금의 나는 오늘에 대한 기대보다 오늘을 살아낼 방법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나는 살아있으면 싶다. 호흡하는 인간으로…. 그리고 시간 속으로….

2018.1.29

얼마 전 부터 서버의 상태가 이상했다.

아니 사실 서버는 별 문제 없었다. 몇가지 해야 할 것들 때문에 이것저것 실험 중인데…

실수로  MySQL을 건드린 것이 화근이었다.

적어두었던 Root 계정의 암호는 당최 먹질 않고, 웹사이트에는 계속 접근 불가로 나오고…

그나마 타임머신으로 백업을 해 놓았던 것이 생각나 복원했더니.. 2017년 12월 28일이 마지막 백업이라 몇 개의 데이터는 살릴 수 없었다.

그걸 감사해야 한다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뭐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거의 없었는데 정상이었을 때 작동하지 않았던 PlugIn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걸 보면서 세상에 무조건 손해 볼 일은 없다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

태어났으니 죽는 것이고

시작했으니 끝이나야 하는 것이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계라는 울타리 안에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불편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걱정되고…

그렇지만 또 살아야 한다.

지금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오늘을 사는 것이다.

2017.10.17

그렇게 한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변한 것은 없고 그저 안주해 있다.

생각이 많아지기 보다는 오히려 생각하는 시간을 없애기 위해 멍한 표정으로 창문 밖이나 아보카도를 보거나 그것도 실증이 나면 밖에서 뜀박질하는 것이 일상이다.

지방과 근육양이 비율이 1:1인 이상한 비만인이 되어 가고 있다.

할 일이 산더미 같다고? 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욕구가 산더미 같이 쌓여져 있다.

아침에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아내를 위해 커피를 내리고, 침구를 정리하고, 율이의 어린이 집 등원을 돕고,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제일 잘한다.

무엇일까?

이 허무와 공허의 뫼비우스 띠에 대해서 가르쳐 준 선생이 없다. 아니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 선,후배 또는 아내 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오롯이 내 안에 담아 두고 쌓아서 높이 우러러 봐야 하는 것일까?

여전히 내 인생과 아내 그리고 아들의 인생은 진행 중에 있다. 인생의 나침반이 고장 나지 않았다면 나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것 만큼은 그것 하나만큼은 내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이 쉽지 않다는 것과 신경쓰고 고민해야 할 것 조차 나는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해야 한다. 해 봐야 한다. 넘어지거나 혹은 쓰러지더라도 그래도 가봐야 한다.

그것 만큼은 내가 제일 잘하는 거 아닌가!!!

[Book Review] 위기를 극복한 리더들의 생각을 읽는다.

Think Leader.

상단의 제목 아래 새겨진 영문 제목이었다.

알고 싶었다는 욕구가 더 컸던 것 같다. 이 책을 사 놓고 책장 한켠에서 언젠가는 그들의 입장이나 그들과 같은 위치의 사람이 되면

그들의 견해와 경험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에 읽지 못하고 방치했었다.

결국 3일 만에 책을 다 읽고, 이렇게 흔적을 남기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2009년도 번역된 이 책을 그 때 읽지 않고, 지금 읽는다는 점 외에는 충분한 가치들이 담겨져 있었다.

새로운 원칙이나 학문적 방향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선택과 유형을 놓고 적절한 비유와 나름의 논리를 세워놓은 내용이 흥미롭다.

저자 크리스토퍼 호에닉은 Leader를 6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1. 이노베이터형
  2. 발견자형
  3. 의사소통형
  4. 선도자형
  5. 창조자형
  6. 실행자형.

읽으면서 놀라는건 내가 이 6가지 유형 모두 배우고 내 몸과 생각 안에서 완전히 습득하여 언제든지 꺼내서 사용할 수 있을까?였다.

절대 그럴수없다고 말하면 나를 제한하는 것 같고,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면 마치 교만의 끝판왕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할 수 있으니 그런 생각을 안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책의 마지막 부록까지 모두 읽은 후, 책을 덮으며 나는 어떤 성향의 사람인가?와 어떻게 나를 발견할 것인가?에 고민이 생겼다.

비교와 복제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분명 그 안에 가장 자연스러운 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자기계발 영역에도 유행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유행과 상관없이 내가 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그런 친구다.

위기를 극복한 리더들의 생각을 읽는다

글을 쓰는 이유.

최근 김영하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비슷한 고민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젊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다. 그 분들에게 내가 좋은 사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내 안에 그 사람에 대한 정체 불명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그 형태는 때로는 붉은 색을 담은 힘이며, 보일 듯 말듯 아주 작은 점이기도 하며, 내 생각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의 깊이와 넓이로 나를 흔들고 자극하는 그런 형태이기도 하다.

오늘은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나도 그런 형태의 사람들과 관계에 지쳐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사색을 즐기거나, 좋은 장소에서 기념이 될 만한 무언가를 했다면 내게 더 유익했을텐데 나는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중독되어 있었다.

아니 사람이 그리웠고, 사람 때문에,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전부였던 시절인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내가 느끼며 생각하는 것을 따라 글을 쓴다.

키보드의 둔탁한 소리 뿐만 아니라 글에 집중하는 짧은 순간만큼은 내 안의 나를 바라보며 나에게 가장 정직한 자세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이유?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신과의 우정을 쌓아가는 시간이다.

아들에서 아버지로.

아이의 키가 자란다. 단순히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 안에는 아이의 정서와 생각 그리고 꿈과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6년 전 아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랬다. 새벽에 갑자기 양수가 터지고,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깨워 짐을 꾸리도록 지시하는 아내와 아무 것도 모른체 호들갑 떨고 있는 내가 있었다.

아무 것도 몰랐다는 건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종종 그 의미를 겸양이나 혹은 그런 척하는 무형의 포장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래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이 아이는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때론 아비가 들어줄 여유가 없고, 어미 또한 정신없어 세세히 돌보지 못해도 아이는 자라고 있었다.

장난스런 표정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남의 자신 보다 더 아끼고 헤아리는 마음을 담은 아이.
내가 바라고 원해서 키운 것도 아닌데 아이는 아비의 걱정 보다 더 잘자라고 있다.

식당에 들어가면 가족끼리 손을 잡고 돌아가며 기도해야 하고, 잠자기 전에는 반드시 가족을 위해, 부모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

‘엄마, 아빠 더 사랑하게 해 주시고, 우리 가족 행복하게 해 주시고,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기도하는 아이.

더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지만… 그저 지금처럼 자라길 바라는 그 욕심 하나만큼은 가져보고 싶다.

아이가 자란다. 나도 늙어간다. 내 아비도 늙어간다. 그렇게 삶은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며, 숨을 멈추는 큰 원 안에 있다.

그럼에도 그 순간. 자라는 순간에 아이의 눈을 맞추고, 아버지의 삶을 담아 보려한다.

아직 아이의 성장을 지켜 볼 이유와 의무와 책임. 무엇보다 삶이 여기에 있다.

장난꾸러기 권율
장난꾸러기 권율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 세가지.

제목이 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힘든 일들을 이 세가지로 구분해 보았다.

  1. 태어나는 것.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어머님의 뱃속에서 자라다 보니 10개월을 채우고 태어나야만 했다. 그렇게 때문에 가장 힘든 일이었다 말하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고, 선택할 수 없었으며, 스스로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사는 것.
    이것 참 어렵다. 목적도 없이 태어나 살다보니 해야할 것 투성이다. 경쟁은 왜 이렇게 많이 해야 하며, 이기기 위해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며 내 또래의 아이들 모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수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보이직 않는 닭장 속에서 말이다.

  3. 죽는 것.
    이게 세번째인 이유는 언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선택을 할 수 있다. 그것을 자살이라 부르고, 그것은 1번에 큰 의미를 주신 분들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이기에 논외로 두자. 그래도 3번이 이녀석이란 건 참 다행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가장 어려운 두 가지의 일을 해낼 수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분해 놓고 보니 2번을 감당하고 있는 오늘의 하루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인생을 아직 잘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어떤 선택이 가장 최선이며 올바른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게 사실이다.

열아홉, 스물살에 고민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참 많은 일들을 해냈다. 건강하게 자랐고, 남들은 해 보지 못한 경험들을 해 보았고, 다른 문화와 언어 그리고 완전히 다른 시스템의 공간에서 일도 해 보았다.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음 챕터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늘이라는 하루만 생각해 보면 괜찮은 커피를 마셨고, 아직 배는 고프지 않고, 아침 부터 아들의 재롱에 찰라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으며, 나아갈 삶을 걱정하며 다독여 주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2번이 진행중이니 다가올 3번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지금은 2번에 집중하자. 제일 힘든 일은 지났으니 일단 살아보자.

나는 박쥐다!

포유류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류도 아닌 어둠과 더욱 친해 그 이미지 마저 ‘흡혈’이라는 단어와 제일 잘 어울리는 존재.

“박쥐”

마치 그 존재 처럼 나도 내 삶에서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실패가 두렵다. 사실 실패보다 실패 한 후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없다는 것이 더욱 무서울 뿐이다.

어떤 일을 하다가도 다시 안정적인 일들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나는 나를 거침없이 박쥐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들 보다 과격한 일들을 거침 없이 해 왔다. 믿고, 버려지는 상황 속에서도 내가 가진 믿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생각 그리고 행동으로 살아왔다.

그런 내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어두운 동굴 속 습한 기운에 몸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배트맨처럼 부자나 탁월한 운동력 혹은 매력이라고는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살펴 보면 내 안의 박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매력은 충분하다 생각한다.

누군가는 의아해 한다. 이런 류의 글을 왜 그렇게 쓰는지? 그리고 이 글이 포스팅되고 나를 걱정해 주시는 분들의 전화가 온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면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비슷한 고민과 걱정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조금이라도 내가 느끼고 생각하며, 고민하는 것들을 정리하여 공유한다면 지금 누구가에게는 힘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

나 자신을 위해 쓴 글이기 때문에 내가 제일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계기 같은 것도 되고,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를 느끼는 근원이 될 수도 있다.

그래! 박쥐다. 흡혈 박쥐같이 잔인한 이미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과일 박쥐는 되지 않을까?

눈을 뜨면 반복되는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 Draft 1위의 신인 Rookie가 아닐 수도 있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간신히 찾을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 어둠 속에서 남도 나도 의식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이를 악물고, 오늘이라는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이들이 있기에 삶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어리석고, 멍청하다 손가락질 당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캄캄한 동굴 속에서 어떠한 기대가 생기지 않을 것 같더라도 동굴 입구에서 비추어오는 실낱 같은 짧은 빛을 따라 나아가다 보면 이내 동굴을 떠나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날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까?

어느 것에도 구분되지 않고, 속하지도 않으며, 자유로운 상태의 날것 그대로의 나.

그게 바로 내가 아닐까? 아침부터 박쥐가 살아있다고 발버둥치는 것도 지친다.

율의 성장 일기 1

여전히 내 눈에는 아가같은 율이가 내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주일.

방송실에서 함께 고생하는 지체가 하반신 마비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배가 끝나고 율이와 함께 병원을 방문했다.

중환자실이라 면회가 제한적이라 얼굴만 보고 나와 주차장을 향하는데..

율이가 내게 묻는다.

“아빠! 삼촌 많이 아파요?”

“아빠는 잘 모르겠어. 율이가 아빠랑 같이 기도할까? 삼촌 빨리 병원에서 나올 수 있도록…”

그러자 율이는 눈물을 흘리며 내게 대답한다.

“삼촌이 너무 불쌍해요! 아빠 삼촌 위해서 우리 오늘 꼭 기도해요.”

내 눈에는 아직도 아가 같은데…. 이 아이는 마음과 생각이 벌써 누군가를 걱정할줄 아는 만큼 성장해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과자를 한껏 먹고, 쓰레기를 아빠에게 건네주는 오만방자한 행동을 하지만 행동과 다르게 많이 성장한 것 같아서 뿌듯하기만 하다.

아이는 그 생각과 감정을 한껏 키워가고 있는데 아비인 나의 시간은 멈춰있는 착각 속에 산다. 그래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지만 내 생각과 감정은 지금 보다 더 어린 시절의 아이만 기억하려는 것 같다.

그 제한을 부수는 순간이 율이와 내가 마시지 않는 술이라 하더라도 한잔 받아 놓고 인생을 이야기 할 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더 많은 요즘이다.

나의 사소함을 하나님이 주목하고 계실까?

나병인.

흔희 그들은 문둥병자라 불리며,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 할 수 없으며 가장 극심한 차별을 겪어야만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저 여기 있어도 죽을 수 밖에 없고, 그 곳에 가도 죽을 수 밖에 없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이었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도 아니고, 선지자로 부터 예언을 들은 것도 아니며, 신비하고 초월적인 어떤 존재의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살고 싶다. 그러나 그들이 죽인다면 죽겠다는 것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4명의 문둥병자. 그들은 그렇게 성경에 기록되고, 예언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귀하게 사용된다.

열왕기하 7장 3절~10절에 기록된 그들은 살고 싶었을 뿐이다.

나의 갈등은 언제나 바닥과 최고의 높이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런 모습이다.

마치 진자의 추처럼 양극단의 끝을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거기 그대로 일상의 사소함을 주목하는 존재가 계시다는 것이다.

나의 사소한 일상이 그렇게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삶일지도 모른다.

내 사는 일생의 날 중에 단 하루라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삶과 죽음

태어난 이상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진자의 추를 따라 흔들리며 양극단이란 선택을 보게 된다.

막상 스마트 폰에 저장된 수많은 전화 보다 저 한통의 전화가 더 도움되나 보다.

디지털 안에 갇혀 마음의 따뜻함을 잊어버린 사람들.

그 군중 속의 고독으로 인해 우리는 극단이란 선택을 하게 되는가 보다.

수많은 십자가가 밤거리를 비추지만, 극단의 선택 앞에 놓인 이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나 보다.

운동 삼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거워진 몸의 가벼워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생각의 무게는 현저 줄어들었다.

가벼워진 생각보다 가벼워지는 몸을 더 기대해 보지만…. 갈 길이 참 멀다.

삶과 죽음

신념이란?

말 그대로 “신념”이란 무엇일까?

명사로 “굳게 믿는 마음”이라 한다. 무엇을 굳게 믿을 것인가?

나에게 어떤 “신념”이라는 것이 생겼을 때, 그 신념은 무엇을 따라서 어떻게 내 안에 발생하고 자란 것일까?

내가 무엇을 믿는지 설명할 수 없는데 그것을 굳게 믿고 있다고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신념이 성숙해져 간다는 의미는 내가 믿고 있는 믿음이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더 깊이, 넓게 자리 잡아 확고한 어떤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내 안의 신념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일까?

한동안은 이런 생각마저도 내게는 사치 같았다. 그저 해가 뜨고, 지는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 주는 게으름에 취해 있었을 뿐이다.

아이의 성장도, 아내의 배려나 섬김도 사치 같고, 어떠한 의미도 될 수 없었으며, 타인의 접근은 말 그대로 방해 또는 일이 되는 것이었다.

내 안의 신념이 바뀐다면 그것은 나를 죽음 또는 지금까지 살면서 쌓아도 모든 과정과 결과 자체를 부정하며, 무너뜨리는 극단적인 상황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했었다.

20대 내가 품었던 “신념”과 30대를 지나 40대의 입구에 선 지금의 내 “신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마치 아이가 언어와 규칙을 배우듯이 나 또한 그 언어와 규칙을 따라 성장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여전히 상황 속에 놓여 위치나 방향을 상실한 채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불안한 조각배에 탑승해 있는 것 같기만 하다.

내 안의 신념이 더욱 성숙해지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신념을 성숙하게 하려면 노력해야 할까?

아직은 모호한 질문들뿐이고, 갈피를 알지 못한다.

그렇게 내 삶의 지도 위에 다양한 경험이란 깃발이 꽂히고, 이 여정의 끝에서 무엇이 자랐는지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세상이 미쳐간다.

http://www.huffingtonpost.kr/2016/08/11/story_n_11441770.html

3살 조카를 살해한 이모의 추가 자백이란 기사다.

조카와 살게 된지 2달 정도 되었다고 한다. 이 아이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부모와 함께 있어야 할 아이가 이모의 집으로 왔는지 알 수 없다.

이모에게는 ‘분노 조절 장애’가 있다고 하는데 그녀의 언니 또는 여동생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점점 사회 최약층에 대한 사망 사건이 증가하고 있다. 그 말은 우리 사회가 점점 최약층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가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잘나신 고위 공직자의 말처럼 개, 돼지이기에 아무렇게나 죽이거나 죽어도 되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정말 먹고 살기 힘든 시대인 것 같다.

한달을 꼬박일해도 미래에 저당잡힌 보험료와 늙어서 받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국민연금에 지역가입자가 되는 순간 내 수입을 고려하지 않은 건강보험료에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전세값과 집값.

어쩔 수 없이 부부 모두 일을 해야 하고, 아이는 남의 손에 맡겨져 키워져야 한다. 그나마 믿고 보낸 어린이 집에서 학대 또는 방치 당하고, 돌아서면 차가운 주검이 되어 돌아 온다. 즐겁게 놀다 오라고 보낸 수학여행이 다시는 이생으로 올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 되었고, 왜 그렇게 이별해야 했는지 말해주는 이가 없다.

세계적인 기업의 총수가 성매매를 하더라도 그 기업의 광고비로 먹고 사는 언론매체는 입을 다물고 있고, 국민의 자주권이 달린 국방의 문제 있어서는 병사들의 의무만 강조될 뿐 논의나 합의 그리고 설명 따윈 없다. 미사일 한방을 막기 위해 수천억씨 써도 병사들의 무기 체계는 내가 군생활하던 시절과 다를 바 없으며…

방산 비리와 4대강 라떼를 눈으로 보면서도 입다물고 있는 전직 대통령 쥐새끼나 현직 닭대가리는 말이 없다.

청소년을 바르게 인도한다는 목사가 그 청소년을 상대로 성폭력을 가해도 사법의 심판은 받을 수 없나 보다. 교회에서 성도를 성희롱하였으나 그 교회에서 돈을 받고 나와 근처의 부지에서 여전히 목회를 하는 목사가 있고, 한국 불교는 썩었다고 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미국 스님도 있으며, 전직 대통령 먼지 털이하던 비서관님은 몇 천억의 자금이 나와도… 대답없는 검찰과 언론이 존재하며…

그런 언론이 참다 못한 개그맨의 외침에는 닭 쫓던 개 같은 대우로 종북으로 몰아가는 세상이다.

3살짜리 아이가 죽었다. 가을에 자문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뛰어다녀야 하는 아이가 한 여름 폭염 속에서 먼길을 떠났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마음이 무겁다. 내 가족만 생각하면 다행일지 몰라도 문을 열고 한발짝만 내딛으면 내 이웃의 일이기 때문이다.

오지랖일까? 사람 사는 세상이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세상이 미쳐간다. 더위에 나도 미쳐간다. 그리고 오늘은 아들과 미친듯이 퍼즐을 해야하는 날이기도 하다. 근데 난 퍼즐이 너무 싫다. 아들이 내가 맞추려고 하면 화를 낸다. 그래서 싫다!

여름 휴가 2.

한낮의 무더위에 지치고, 밤에는 폭염으로 늘어지는 요즘이다.

아이에게는 날씨가 의미 없고, 그저 해가 뜨고, 진 것으로 자신의 할 일과 놀이를 탐구하는 것이 전부인 요즘이다.

양평 처가에서 장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율이가 엄마에게 말한다.

“다음에는 큰 삼촌, 작은 삼촌, 숙모 형아, 누나들 모두 할머니 집에서 사진 찍었으면 좋겠다.”고…

아들의 마음에 점점 작아지는 이유는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아이의 입으로 먼저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른으로서 어른다운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내내 율이는 고모와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는다. 율이의 방학 일주일은 그렇게 웃어른들과 시간을 보내는 그런 날이 되었다.

양평 처가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시는 장모님을 따라 산책을 나가는 율.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를 살뜰하게 챙기는 모습에서 아내는 여러번 울컥 했다고 한다.
아이의 인성을 어떻게 키울지 고민을 많이 했다. 여러가지 활동을 시켜 볼까도 했지만 아내와 내가 선택한 것을 몸소 실천하는 것. 아내와 나는 한달에 많게는 10번 이상씩 본가를 다녀가고, 한국에 귀국하고 격주마다 양평을 내려 오기도 했다. 그저 찾아뵙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을 뿐인데 아이는 부모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내 자식 하나만 잘 키우면 될까? 내가 자라던 시절에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들로 산으로 다녔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자신의 집에 화장실이 몇 개인지? 또는 친구의 집이 몇 평인가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한다. 부모의 영향이겠지… 싶다가도 덜컹 율이도 그럴까?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을 다 잡는 것이 일이 되었다.

설빙에서 3

아내와 가까운 교회 집사님이 보내주신 쿠폰. 율이는 “까페가요?”를 반복하며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 한다. 이 날 뿐만 아니라 차를 타면 “할머니 집에 가요?”, “고모한테 가요?”, “우리 어디가요?”로 자신의 궁금한 것들을 표현하려 한다.

설빙에서 2

설빙에서 1

입추(立秋)가 지났으니 볕은 따갑고, 바람은 선선해 지겠지? 벼는 점점 누런 머리를 들어내며 익어갈 것이고, 우리 집 하천 어귀에는 코스모스와 잠자리가 날아다닐 때가 오겠지. 여름 휴가가 끝났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뜬구름 잡듯 둥둥 떠다니고 있다. 생각을 바로 잡아 굳건히 해야할 지금. 나는 여전히 양평의 그늘에서 돗자리를 깔고 잠을 자고 있는 것 같기만 하다.

여름 휴가 1.

1년에 한번.
외국과는 다르게 여름 휴가라는 불리는 1주일간의 휴가가 노동자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물론 현실에서는 못 가는 이들도 있다.)

약 8개월 동안 피아노와 클라리넷 Lesson 때문에 쉬지 못했던 아내가 1주일 휴가를 냈고,

우리는 본가를 시작으로 양평 처가까지 여름 휴가를 계획했다.

월요일에는 율이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가 있는 곳으로 갔지만.. (휴관일 ㅠㅠ)
화요일에는 아버지의 병원 진료 예약 때문에 내가 바뻐서 정신 없이 역곡과 인천을 왔다 갔다. 그 사이 율이는 XX마트에서 잠을 주무시고

우리는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물고 인천 집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수요일 아침에 떠나기로 했던 여정을 앞당겼다.

다리 하나 사이로 인천에는 비가 왔지만 일산 방향의 외곽순한도로는 건조한 상태였고, 막히지 않는 시간이라서 쉽게 양평에 도착했다.

수요일 아침 부터 장모님께 필요한 것들을 위해 별내 X마트로 출발!
이것 저것 사다 보니 점심 시간이라 간밤에 검색한 “허참 갈비”로 이동. 권율은 차에서 잠들었다가 깨서는 혼자 2인분을 흡입하고, 장모님과 나는 밥에 된장찌개를 한그릇씩 헤치우고, 예전에 친구 용환이와 호성이와 함께 갔던 “테라스”까페로 이동하려 했으나…

남양주 가운동에 위치한 “강변X산교회” 녹화 장비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다행히 까페로 가는 방향이 같아서 일단 차를 돌렸다.

1시간 남짓 장비 문제를 파악하고, 처리. 율이는 교회 유아실에서 신나게 놀고, 장모님은 차에서 쉬시고…

그렇게 후다닥 처리하고 까페에 오고 나니… 집이 그립더라.

바로 집으로 차를 돌리고 도착하니 율이가 심심해 하더라.

그래서 장모님 집 앞에 율이가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볼풀에 물을 채워 간이 수영장을 만들어 줬더니…
이건 뭐 혼자서 소리지리고.. 난리도 아니네.. (다만 좀 작은것인.. 안습)

양평 외할머니 집

@양평외할머니집 2

@양평외할머니집 3

아내는 오래된 먼지와 냉장고 청소 그리고 빨래까지.. 바쁘고, 나는 화장실 청소와 주변 정리에..

놀고 있는 율이를 바라보시는 장모님의 표정에서 잘 왔다는 생각과 안도감이 생겼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여전히 죄송하고, 안타까운 현실.

남들은 들로, 산으로, 놀이 동산으로 다니기 바쁠때.

우리 부부는 고작 본가와 처가를 방문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그래도 율이가 커가고 있을 때 방문할 곳이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언제까지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것으로도 족할 따름이다.

그래도 가 보는거다.

아버지가 내 나이 마흔일 때, 아버지의 등 뒤에는 어머니를 포함하여 5명의 무게가 있었다.

그 무게를 더 가중한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동생들이었는데 어머니에게는 11명이 아버지에게는 1명의 형제가 더 있었다.

출가하면 외인인데 이모, 삼촌들은 때때로 6명이 자도 꽉 차는 우리 집에 들어와 여러 가지 이유와 명분으로 더부살이했었고, 사춘기를 보내던 누이들의 어려움은 내 나이가 되어서야 조금 깨닫는듯하다.

때때로 출가한 이모 중에 부부싸움이 나면 우리 집으로 피신을 왔는데 그때마다 우리 집 살림과 아무것도 모르고 자던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의 시선에는 도저히 이해 안 되는 사태이기도 했다.

지금은 다들 자신들의 삶에 충실하다 보니 연락도 뜸해지고, 이따금 사촌들의 결혼식이나 있으면 모일까? 내게는 크게 의미가 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아버지의 무게를 이야기하려다 멀리 돌아온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가 지고 있던 책임이란 무게는 지금 내가 아내와 율이를 돌보는 것 이상의 무게감을 지니고 계셨다 아버지에게 무엇을 배웠던 것일까? 하루하루 일상의 고단함과 육체노동의 한계를 경험하시던 그 삶을 무엇에 빗대어 설명해야 내 안에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저 아버지와 내 삶이 다르고,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와 내가 사는 시대의 변화에 이 모든 의미를 맡기고, 나는 그것들을 핑계 삼아 먼 길 떠날 준비를 하시는 아버지를 보내야 한단 말인가?

어쩌면 내가 아버지의 무게를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이 시도 자체가 내 안에 높아져 버린 교만과 아집의 결정체가 아닐는지?

그렇게 아들이 아버지가 되어서야 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삶은 세대를 이어가는 생육과 번성이란 이 굴레 안에 많은 것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직 아버지의 나이에 이르려면 지금껏 살아온 날들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아야 하고, 그 안에서 내 아버지가 느꼈을 희로애락을 나도 느껴야만 알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내가 두 눈을 감는 날. 아들 율이가 이 글을 읽고, 나와 비슷한 마음을 품고 늙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다.

이 Server가 죽지 않는 한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

여유에 대해서

삶에서 행복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남부럽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만족의 최고점에 이르러 남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순간일까?

아들이 1주일 동안 아펐다. 아내는 매일 오후에 잡혀있는 레슨 스케줄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나와 율이 단 둘이서 함께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었다.

첫 날은 카봇 동영상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단기간 동안에만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일 뿐 좋은 선택은 될 수 없었다.

간간히 산책을 나가더라도 율이 안에 있는 무한한 에너지를 만족시키거나 채울 수 없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무작정 가보자였다.

레슨이 끝난 아내를 차에 태우고, 정처 없이 친구가 권해 준 곳으로 운전을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율이가 잠들면 모든 계획을 망치는 것이기에 신나는 카봇 주제곡으로 흥을 돋우고, 아내는 쉬지않고 율이의 흥에 장단을 맞춘다.

도착한 곳은 경인 여객터미널.

휑한 곳에 배와 물이 어우러져 있고, 인적이 드물어 율이가 뛰며, 소리지르기에는 적합한 것 같았다.

24층 전망대에 올라 탁트인 공간을 보며, 안도의 한쉼을 내쉬고, 전망대에서 내려와 갈매기를 구경할 때 센스가 넘치는 아내는 근처 편의점에서 율이가 마실 음료와 새우깡 하나를 가방에 넣어서 나온다.

새우깡을 꺼내는 순간. 모든 갈매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고, 나는 그 많은 새우깡 중에 하나를 꺼내 이 사진을 찍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율이는 떠날 때 보다 더 들뜬 목소리로 갈매기에게 새우깡 준 이야기를 쉬지 않고 말하다 잠이 들었고, 아내는 내게 고생했다는 수고의 말을 전한다.

다른 아빠들처럼 가지고 싶은 것을 많이 사주는 아빠도 아니고, 남들 처럼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살수 있도록 경제적 여유를 제공하는 아빠도 아니건만…

아들의 모습에서 괜한 걱정과 미안한 마음은 없고, 고맙고, 행복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잠들기 전 엄마에게 “율이 오늘 행복해요.”라며 말하는 아들.

내게는 인생이 복잡한데 아들의 행복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의 불안함을 넘어서는 그것은…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것들의 회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여전히 불안하고 두렵다. 그러나 아들을 보며 다시금 자세를 바로 잡아 본다.

“행복은 의외로 단순하다.”

새우깡 먹는 갈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