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5

간밤의 꿈을 잃어버린 나는 방황하듯 홀로 울부짖는 늑대가 되었다.

현실이 부여한 어깨의 걱정과 근심 그리고 내 배 주위로 둘러싼 염려는 결코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멈추고 싶다.

이 시계를 멈추고 싶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멈추지 않는 수없이 많이 조각난 짧은 찰나의 순간 모두를 부숴버리고 나는 다시 기나긴 꿈속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그러나 멈춰지지 않는다.

아주 잠깐이라도 나의 의지와 바램과 소망이라 불리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오길 바라보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여전히 그 ?몽념에 갇혀 있는 것이다.

도망가고 싶다.

멈추고 싶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내게도 타인에게 넘겨준 배려와 용서 그리고 긍휼의 시선을 베푸는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나를 향한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일까?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부족한 것들 뿐이어서 나는 이 고통의 수레를 벗어나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의 인자하신 손길과 그분의 긍휼을 기다린 지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모른다.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을 하루하루 채워가지만 내가 기대하는 것과 그분의 바램은 너무나 다른 것으로만 보인다.

나는 확실히 갈 길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그 자리에 멈춰서 은혜를 구걸하는 거지가 되어야 할지 선택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나를 둘러싼 이 두려움의 저주를 비껴갈 방법을 모르겠다.

그저 눈물로 내 안에 새겨진 저주의 상처들을 하나하나 닦아 내려갈 뿐이다. 내게 주어진 이 상황과 상처들을 모두 끌어안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인가 보다.

밤은 깊어가고 낮이 밝아 오려 한다.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이지만 지금의 나는 오늘에 대한 기대보다 오늘을 살아낼 방법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나는 살아있으면 싶다. 호흡하는 인간으로…. 그리고 시간 속으로….

20180211

눈을 뜨는 것이 무섭기만 하다.

아침은 새로운 시작이 되지 않고, 두려움의 시작이 된 지 한참은 된 것 같다.

여전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 반복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침의 새로움이 시작이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찌뿌둥한 몸을 움직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같은 시간에 일어나 일정한 형태로 반복하는 행동이나 일들을 본다.

먼저는 비타민을 마시는 것이며, 둘째는 따뜻한 차를 그러고도 잠이 깨지 않으면 진한 커피나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이다.

잠이 덜 깬 나의 정신과는 반대로 아내와 아이는 분주하기만 하다.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기 위해 아내는 식사와 옷 그리고 가방과 필요한 것을 챙기고, 아내도 운동을 위해 여벌 옷과 수업을 위해 필요한 것을 주섬주섬 가방에 넣는다.

이 아침에 홀로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일상을 경험하는 사람이 바로 나란 존재다. 내 시간은 멈춰있다. 그것도 거의 일정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다 공복이 주는 신호 때문에 밥솥을 뒤지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이때부터 부족한 시간과 정서적 불안감 그리고 스스로 부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리저리 바빠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 한숨을 돌리려 하면 아이와 아내가 돌아올 시간이다. 그리고 나의 시간 아니 그러니까 나의 일상은 거기서 멈춰버린다.

무의미하다는 것이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상이 이런 것일까?

알 수 없다. 아둘람 동굴에서 다윗도 그런 기분으로 머물렀을까? 주위에는 온통 도둑과 강도 그리고 나름대로 상처와 울분을 품은 이들을 곁에 두고 그도 이런 일상을 맞이했을까? 그저 몇 장으로 이루어진 책에는 다 나와 있지 않지만, 그 두려움을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다. 그 동굴에서 그는 무슨 꿈을 꿨을까? 어떻게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고, 그 용기를 어떤 방법으로 도둑과 강도들을 설득했을까?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결과를 보자면 그는 그 안에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방법을 배웠고, 그의 능력과 실력이 되어 도둑과 강도 그리고 상처가 가득한 사람들을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데 가장 필요한 인물들로 바꾸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 되었다.

지금 내가 그 소망을 내 맘에 품고 기다리고 있다.

[Book Review] 위기를 극복한 리더들의 생각을 읽는다.

Think Leader.

상단의 제목 아래 새겨진 영문 제목이었다.

알고 싶었다는 욕구가 더 컸던 것 같다. 이 책을 사 놓고 책장 한켠에서 언젠가는 그들의 입장이나 그들과 같은 위치의 사람이 되면

그들의 견해와 경험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에 읽지 못하고 방치했었다.

결국 3일 만에 책을 다 읽고, 이렇게 흔적을 남기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2009년도 번역된 이 책을 그 때 읽지 않고, 지금 읽는다는 점 외에는 충분한 가치들이 담겨져 있었다.

새로운 원칙이나 학문적 방향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선택과 유형을 놓고 적절한 비유와 나름의 논리를 세워놓은 내용이 흥미롭다.

저자 크리스토퍼 호에닉은 Leader를 6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1. 이노베이터형
  2. 발견자형
  3. 의사소통형
  4. 선도자형
  5. 창조자형
  6. 실행자형.

읽으면서 놀라는건 내가 이 6가지 유형 모두 배우고 내 몸과 생각 안에서 완전히 습득하여 언제든지 꺼내서 사용할 수 있을까?였다.

절대 그럴수없다고 말하면 나를 제한하는 것 같고,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면 마치 교만의 끝판왕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할 수 있으니 그런 생각을 안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책의 마지막 부록까지 모두 읽은 후, 책을 덮으며 나는 어떤 성향의 사람인가?와 어떻게 나를 발견할 것인가?에 고민이 생겼다.

비교와 복제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분명 그 안에 가장 자연스러운 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자기계발 영역에도 유행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유행과 상관없이 내가 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그런 친구다.

위기를 극복한 리더들의 생각을 읽는다

글을 쓰는 이유.

최근 김영하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비슷한 고민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젊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다. 그 분들에게 내가 좋은 사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내 안에 그 사람에 대한 정체 불명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그 형태는 때로는 붉은 색을 담은 힘이며, 보일 듯 말듯 아주 작은 점이기도 하며, 내 생각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의 깊이와 넓이로 나를 흔들고 자극하는 그런 형태이기도 하다.

오늘은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나도 그런 형태의 사람들과 관계에 지쳐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사색을 즐기거나, 좋은 장소에서 기념이 될 만한 무언가를 했다면 내게 더 유익했을텐데 나는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중독되어 있었다.

아니 사람이 그리웠고, 사람 때문에,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전부였던 시절인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내가 느끼며 생각하는 것을 따라 글을 쓴다.

키보드의 둔탁한 소리 뿐만 아니라 글에 집중하는 짧은 순간만큼은 내 안의 나를 바라보며 나에게 가장 정직한 자세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이유?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신과의 우정을 쌓아가는 시간이다.

아들에서 아버지로.

아이의 키가 자란다. 단순히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 안에는 아이의 정서와 생각 그리고 꿈과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6년 전 아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랬다. 새벽에 갑자기 양수가 터지고,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깨워 짐을 꾸리도록 지시하는 아내와 아무 것도 모른체 호들갑 떨고 있는 내가 있었다.

아무 것도 몰랐다는 건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종종 그 의미를 겸양이나 혹은 그런 척하는 무형의 포장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래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이 아이는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때론 아비가 들어줄 여유가 없고, 어미 또한 정신없어 세세히 돌보지 못해도 아이는 자라고 있었다.

장난스런 표정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남의 자신 보다 더 아끼고 헤아리는 마음을 담은 아이.
내가 바라고 원해서 키운 것도 아닌데 아이는 아비의 걱정 보다 더 잘자라고 있다.

식당에 들어가면 가족끼리 손을 잡고 돌아가며 기도해야 하고, 잠자기 전에는 반드시 가족을 위해, 부모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

‘엄마, 아빠 더 사랑하게 해 주시고, 우리 가족 행복하게 해 주시고,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기도하는 아이.

더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지만… 그저 지금처럼 자라길 바라는 그 욕심 하나만큼은 가져보고 싶다.

아이가 자란다. 나도 늙어간다. 내 아비도 늙어간다. 그렇게 삶은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며, 숨을 멈추는 큰 원 안에 있다.

그럼에도 그 순간. 자라는 순간에 아이의 눈을 맞추고, 아버지의 삶을 담아 보려한다.

아직 아이의 성장을 지켜 볼 이유와 의무와 책임. 무엇보다 삶이 여기에 있다.

장난꾸러기 권율
장난꾸러기 권율

나는 박쥐다!

포유류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류도 아닌 어둠과 더욱 친해 그 이미지 마저 ‘흡혈’이라는 단어와 제일 잘 어울리는 존재.

“박쥐”

마치 그 존재 처럼 나도 내 삶에서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실패가 두렵다. 사실 실패보다 실패 한 후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없다는 것이 더욱 무서울 뿐이다.

어떤 일을 하다가도 다시 안정적인 일들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나는 나를 거침없이 박쥐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들 보다 과격한 일들을 거침 없이 해 왔다. 믿고, 버려지는 상황 속에서도 내가 가진 믿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생각 그리고 행동으로 살아왔다.

그런 내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어두운 동굴 속 습한 기운에 몸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배트맨처럼 부자나 탁월한 운동력 혹은 매력이라고는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살펴 보면 내 안의 박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매력은 충분하다 생각한다.

누군가는 의아해 한다. 이런 류의 글을 왜 그렇게 쓰는지? 그리고 이 글이 포스팅되고 나를 걱정해 주시는 분들의 전화가 온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면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비슷한 고민과 걱정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조금이라도 내가 느끼고 생각하며, 고민하는 것들을 정리하여 공유한다면 지금 누구가에게는 힘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

나 자신을 위해 쓴 글이기 때문에 내가 제일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계기 같은 것도 되고,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를 느끼는 근원이 될 수도 있다.

그래! 박쥐다. 흡혈 박쥐같이 잔인한 이미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과일 박쥐는 되지 않을까?

눈을 뜨면 반복되는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 Draft 1위의 신인 Rookie가 아닐 수도 있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간신히 찾을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 어둠 속에서 남도 나도 의식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이를 악물고, 오늘이라는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이들이 있기에 삶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어리석고, 멍청하다 손가락질 당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캄캄한 동굴 속에서 어떠한 기대가 생기지 않을 것 같더라도 동굴 입구에서 비추어오는 실낱 같은 짧은 빛을 따라 나아가다 보면 이내 동굴을 떠나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날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까?

어느 것에도 구분되지 않고, 속하지도 않으며, 자유로운 상태의 날것 그대로의 나.

그게 바로 내가 아닐까? 아침부터 박쥐가 살아있다고 발버둥치는 것도 지친다.

삶과 죽음

태어난 이상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진자의 추를 따라 흔들리며 양극단이란 선택을 보게 된다.

막상 스마트 폰에 저장된 수많은 전화 보다 저 한통의 전화가 더 도움되나 보다.

디지털 안에 갇혀 마음의 따뜻함을 잊어버린 사람들.

그 군중 속의 고독으로 인해 우리는 극단이란 선택을 하게 되는가 보다.

수많은 십자가가 밤거리를 비추지만, 극단의 선택 앞에 놓인 이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나 보다.

운동 삼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거워진 몸의 가벼워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생각의 무게는 현저 줄어들었다.

가벼워진 생각보다 가벼워지는 몸을 더 기대해 보지만…. 갈 길이 참 멀다.

삶과 죽음

신념이란?

말 그대로 “신념”이란 무엇일까?

명사로 “굳게 믿는 마음”이라 한다. 무엇을 굳게 믿을 것인가?

나에게 어떤 “신념”이라는 것이 생겼을 때, 그 신념은 무엇을 따라서 어떻게 내 안에 발생하고 자란 것일까?

내가 무엇을 믿는지 설명할 수 없는데 그것을 굳게 믿고 있다고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신념이 성숙해져 간다는 의미는 내가 믿고 있는 믿음이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더 깊이, 넓게 자리 잡아 확고한 어떤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내 안의 신념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일까?

한동안은 이런 생각마저도 내게는 사치 같았다. 그저 해가 뜨고, 지는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 주는 게으름에 취해 있었을 뿐이다.

아이의 성장도, 아내의 배려나 섬김도 사치 같고, 어떠한 의미도 될 수 없었으며, 타인의 접근은 말 그대로 방해 또는 일이 되는 것이었다.

내 안의 신념이 바뀐다면 그것은 나를 죽음 또는 지금까지 살면서 쌓아도 모든 과정과 결과 자체를 부정하며, 무너뜨리는 극단적인 상황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했었다.

20대 내가 품었던 “신념”과 30대를 지나 40대의 입구에 선 지금의 내 “신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마치 아이가 언어와 규칙을 배우듯이 나 또한 그 언어와 규칙을 따라 성장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여전히 상황 속에 놓여 위치나 방향을 상실한 채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불안한 조각배에 탑승해 있는 것 같기만 하다.

내 안의 신념이 더욱 성숙해지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신념을 성숙하게 하려면 노력해야 할까?

아직은 모호한 질문들뿐이고, 갈피를 알지 못한다.

그렇게 내 삶의 지도 위에 다양한 경험이란 깃발이 꽂히고, 이 여정의 끝에서 무엇이 자랐는지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