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1

눈을 뜨는 것이 무섭기만 하다.

아침은 새로운 시작이 되지 않고, 두려움의 시작이 된 지 한참은 된 것 같다.

여전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 반복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침의 새로움이 시작이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찌뿌둥한 몸을 움직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같은 시간에 일어나 일정한 형태로 반복하는 행동이나 일들을 본다.

먼저는 비타민을 마시는 것이며, 둘째는 따뜻한 차를 그러고도 잠이 깨지 않으면 진한 커피나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이다.

잠이 덜 깬 나의 정신과는 반대로 아내와 아이는 분주하기만 하다.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기 위해 아내는 식사와 옷 그리고 가방과 필요한 것을 챙기고, 아내도 운동을 위해 여벌 옷과 수업을 위해 필요한 것을 주섬주섬 가방에 넣는다.

이 아침에 홀로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일상을 경험하는 사람이 바로 나란 존재다. 내 시간은 멈춰있다. 그것도 거의 일정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다 공복이 주는 신호 때문에 밥솥을 뒤지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이때부터 부족한 시간과 정서적 불안감 그리고 스스로 부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리저리 바빠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 한숨을 돌리려 하면 아이와 아내가 돌아올 시간이다. 그리고 나의 시간 아니 그러니까 나의 일상은 거기서 멈춰버린다.

무의미하다는 것이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상이 이런 것일까?

알 수 없다. 아둘람 동굴에서 다윗도 그런 기분으로 머물렀을까? 주위에는 온통 도둑과 강도 그리고 나름대로 상처와 울분을 품은 이들을 곁에 두고 그도 이런 일상을 맞이했을까? 그저 몇 장으로 이루어진 책에는 다 나와 있지 않지만, 그 두려움을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다. 그 동굴에서 그는 무슨 꿈을 꿨을까? 어떻게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고, 그 용기를 어떤 방법으로 도둑과 강도들을 설득했을까?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결과를 보자면 그는 그 안에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방법을 배웠고, 그의 능력과 실력이 되어 도둑과 강도 그리고 상처가 가득한 사람들을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데 가장 필요한 인물들로 바꾸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 되었다.

지금 내가 그 소망을 내 맘에 품고 기다리고 있다.

2018.1.30.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함께 나누며 각자의 위치에 자신의 해야 할 것을 바르게 알며, 올곧게 그 길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관계가 있을까?

남편과 시아버지는 죽고, 이제 남은 것은 시어머니와 형님뿐인 상황에 놓은 이방 여인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한때 그녀와 남편과 시부모는 굉장히 부유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녀의 동네로 이사를 왔고, 그녀는 두 형제 중의 막내에게 시집을 갔다.

단란하게 가족을 꾸리고 행복을 느꼈던 것도 잠시, 순식간에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 단호한 슬픔이 되어 그녀의 삶 전체를 뒤바꿔 버렸다.

시아버지를 시작으로 남편과 그의 형의 죽음을 지켜 보았고,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을 포함한 여인 셋.

그렇게 그녀들의 슬픔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 날 시어머니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며느리들을 앉혀 놓고, 각자의 갈 길을 가라고 권하고 있었다.

큰 형님은 자신의 길을 가기로 선택하고, 그녀 홀로 시어머니 옆에서 살며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한다.

어찌 된 일인지 고향으로 돌아온 시어머니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은 하나 없었다. 소망은 그렇게 소망이란 이름으로 불릴 뿐 다른 이유나 목적 그리고 주린 배를 채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추수가 끝난 넓은 들판에 나아가 떨어진 이삭을 주어다가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이 전부.

그러나 그녀는 이방인이라는 차별의 멍에를 두르고 들판에 나아가 홀로 이삭을 주우며 생활한다.

대부분의 삶이 이렇게 끝이 나지 않던가? 그리고 시어머니와 행복했다. 배부르게 먹고 즐겁게 살았다. 이런 문장이 마지막에 남으면 한 여인의 인생도 그녀와 함께 했던 시어머니의 인생도 끝이 나고 만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시어머니의 먼 친척 중에 부유한 사람이 있었고,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그는 그녀를 위해 사람을 시켜 들판에 많은 이삭을 일부러 떨어뜨려 놓기도 하고, 그녀에게 음식과 물을 주며 빡빡한 인생에 잠시나마 쉼을 주기도 한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와 시어머니에게 오늘 일어난 일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시어머니는 몇 가지를 지시하고 며느리인 그녀는 그 지시 사항을 따르며 지켜낸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 출가하는 그녀. 그리고 그녀의 삶 전체를 멍에로 이끌고 있던 이방인에서 이제 그녀는 한 남자의 당당한 아내로 그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문의 기록된 여인으로 그 이름이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굿룻”이란 여인의 이야기이다.

아침부터 깨어진 관계와 인생을 묵상하는데 내게 보인 의미가 바로 그녀의 삶 자체였다. 쉬운 삶은 없으며, 100% 만족이란 이름으로 꽉 채워진 인생도 없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는 잃어버린 부분도, 채워진 부분도 함께 존재하며 그 두 가지가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며 인생의 굴곡을 만들지 않던가?

나는 오늘 아침에도 이 글을 남기며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로 결정한다.

그 분이 아니면 내 인생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 분이기 때문에 내 삶의 어떠한 고난도 일방적인 폭력으로 기억으로 존재하지 않고, 나를 연단하기 위한 훈련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린다.

나의 사소함을 하나님이 주목하고 계실까?

나병인.

흔희 그들은 문둥병자라 불리며,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 할 수 없으며 가장 극심한 차별을 겪어야만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저 여기 있어도 죽을 수 밖에 없고, 그 곳에 가도 죽을 수 밖에 없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이었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도 아니고, 선지자로 부터 예언을 들은 것도 아니며, 신비하고 초월적인 어떤 존재의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살고 싶다. 그러나 그들이 죽인다면 죽겠다는 것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4명의 문둥병자. 그들은 그렇게 성경에 기록되고, 예언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귀하게 사용된다.

열왕기하 7장 3절~10절에 기록된 그들은 살고 싶었을 뿐이다.

나의 갈등은 언제나 바닥과 최고의 높이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런 모습이다.

마치 진자의 추처럼 양극단의 끝을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거기 그대로 일상의 사소함을 주목하는 존재가 계시다는 것이다.

나의 사소한 일상이 그렇게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삶일지도 모른다.

내 사는 일생의 날 중에 단 하루라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나니아 연대기 2 캐스피언의 왕자를 통해서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의 왕자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의 왕자

아내와 함께 이 영화를 다시 보다가…
우연히 주인공들의 대화에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보게 된다.

1편과는 다르게 주인공과 캐스피언 왕자는 현실 앞에 놓여진 문제(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피터가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려 하자 루시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아슬란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피터는 자신들의 방법을 따라 시도하고 그 결과 많은 전사들이 죽는 결과를 본다. 그리고 캐스피언 왕자는 유혹에 빠져 하얀 마녀을 부활하려는 계략에 빠지게 된다.

뭐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 정도….

언제부터 나에게 일어는 어려움 또는 문제가 있을 때 자연스럽게 다양한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 방법 안에는 기도와 간구가 포함되지만 그것도 그저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몸에 벤 행동에 불과 했다. 루시의 말에서 내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다양한 방법론을 찾을 때 본질을 기다리고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뿐 일관성이 있는 기다림과 존재에 대한 기도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 안에서 행동이 중요한 것인데…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을 잊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슬란은 루시에게 “왜 처음 부터 나를 찾지 않았냐?란 질문에 루시는 확신이 없었다고 대답하고,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루시가 “왜 오지 않았던 거죠?”라고 묻자 “같은 일은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며 아슬란은 대답한다.

C.S Lewis는 그렇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도 정말 쉽게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 질문 안에 답이 있을 것이다.

이삭. 그의 인생

피하는 것은 비겁하고, 초라하고,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 남자를 만나면서, 피하는 것이 결코 비겁하고, 초라하고, 어리석은 행동이 아님을 봅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그 사실과 이유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남자가 아버지를 따라 산행길을 나섭니다. 아버지는 항상 집 근처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날 아침. 아버지는 갑자기 짐을 나귀에게 싣고 자신을 따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들은 그저 항상 하던 제사를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드리는 줄 알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아들은 항상 아버지 곁에서 지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에 드리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아침은 조금 달랐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 때 즈음.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어봅니다. “아빠! 제사에 드릴 양은 어디에 있나요?” 아버지는 놀랐을 겁니다. 아들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아버지는 아들에게 “번제에 드릴 제물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실 거야.”라고 대답하며 가던 길을 재촉합니다. 아들은 그 말을 정말 믿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 갑니다. 마침내 그 산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끈을 묶습니다. 성경은 이삭이 반항 했다거나 도망 가거나 아버지에게 소리 질렀다고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 아들의 목에 칼을 든 순간.

하나님의 천사가 소리 칩니다.
“아브라함! 아브라함! 멈춰라! 알았다. 그에게 손대지 말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이제야 알았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무에 뿔이 걸린 수양을 대신 번제로 드립니다.

어린 시절의 이런 경험은 쉽게 잊혀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의 인생에서도 수많은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10대. 사춘기 시절을 이미 백살이 넘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보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강해 보이는 이복형이 자신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사랑하는 어머니가 떠납니다. 이 아들은 어떻게 삶을 이겨내야할 지 잘 모릅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해질녁 즈음에 묵상을 하며 서성이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내가 생기고, 비로소 그는 마음에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하는 일들이 너무 잘 되어서 주변의 다른 이들이 시기 하기 시작합니다. 이웃 마을의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가 파 놓은 우물을 막고, 쫓아내려 합니다. 그는 다시 막힌 우물을 팝니다. 그러면 이웃 마을 사람들이 와서 자신들의 우물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면 또 장소를 옮깁니다. 그런 일을 반복하면 짜증이 날 겁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 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슬퍼런 칼 끝이 자신을 향하고 있을 때, 자신을 대신할 수양을 준비하시던 그 하나님의 섭리와 방법 그리고 그 분이 일하시는 모든 것이 옳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우물 파는 일이 거의 마쳐 갑니다. 그 때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이름을 부르던 그 목소리가 이제는 이삭을 찾아 옵니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미 유년 시절에 아버지에게 죽임 당할 뻔 한 소년이 이제 장성해서 40살이 넘었는데 무서워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두려워 말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뜻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소심하고, 나약하게, 그리고 비겁하게 이웃 마을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그의 마음 한 구석을 보셨던 것 아닐까요?

그 남자의 인생 이야기가 오늘 제 마음을 울립니다. 39살. 이 회사, 저 회사를 옮기며 소명이라는 것을 찾고 싶었습니다. 함께 마음과 뜻을 다해 좋은 일을 세워 갈 수 있는 그런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간절히 원했던 회사에 당당하게 입사해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를 따져 가며 새로운 방법과 다양성을 찾아가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는 그 남자처럼 거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인생 만큼이나 비겁하고, 소심하고, 어리석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은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면 괜찮은 겁니다. 그가 인도하시기 때문에… 나는 오늘 괜찮은 인생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