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혹의 나이라 한다.
이 시기에 무언가 배운다고 결정하면 ‘누군가는 어리석다.’ 어떤 이는 ‘부양할 가족들은?’이런 걱정과 의문에 가득한 질문들을 받곤 한다.
나의 20대는 내 인생의 후반이 없는 것처럼 선교단체에 헌신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내 삶을 이끌어갈지 고민하지 않은 채 ‘나의 부르심이 그곳에 있었다.’고 착각할 만큼 극단적인 결정을 했던 시절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도 내 안에 가득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나의 반응이었고, 그 결정에 대해서 만큼은 후회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나니 내 행동에 후회보다는 내 또래의 비슷한 사람들과의 행보에 대한 부러움이 가득한 시절이기도 했다. 부모가 내어주는 등록금으로 학교에 다니고, 직업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러다 방향이 잡히지 않으면 쉽게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그런 친구들 말이다. 이상하게 내 주변에는 그런 친구들이 유독 많았는데 하나님은 그 때부터 남과 비교하는 인생으로 살지 않도록 나를 훈련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부러운 시절에 나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친구가 다니는 회사에 입사했다. 스피커를 조립하고, 조율하고, 포장하고, 배달하고…. 때로는 꽉 막힌 사장의 자랑을 귀가 막힐 정도로 듣고 또 들어야만 했다. 경기 불황이란 이유로 함께 일하던 친구들도 하나, 둘씩 회사를 그만두고 마지막까지 남은 나는 다른 대안이 생길 때까지 참아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 인내에 종지부를 찍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추석 휴가비’였다.
사장은 경기가 좋지 않고, 힘드니까 서로 이겨내자며 나를 다독였고, 나는 그 말을 찰떡같이 믿었다. 긴 연휴가 끝나고 연휴 동안 있었던 일을 커피 믹스의 설탕이 녹아 들어가듯 나누고 있는데 사장이 조카들에게 나눠준 용돈을 이야기했고, 기가 막히게 기억력이 좋은 나는 그 말에 힘드니까 이겨내자는 사장의 말은 휴가비를 주지 않기 위한 술수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을 더 고민하던 중에 사장은 또 경기가 좋지 않아 급여를 정확한 날짜에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때가 내 기억에는 이미 2달이 밀린 상태였는데 또 지급되지 않는 현실에 낙담할 수 밖에 없었다. 함께 일하던 김 주임은 추석 그 사건이 있었던 이후로 무단결근으로 나오지 않았고, 결국에는 사직하게 되었다. 사직하는 순간에도 사장은 밀린 임금이나 다른 처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환송회 없이 그렇게 퇴사를 종료했다.
김 주임이 퇴사한 직후 사장은 내게 ‘경기가 좋아지면 급여를 올려줄 테니 그때까지 참아보자.’고 했다. 그러나 경기가 좋아져도 내 급여가 오를 것이라는 확신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사장의 미국 지인으로부터 배송된 새로운 장비들이 들어 오고 있었고, 나는 내 급여가 저런 곳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퇴사 의지를 전달했을 때, 사장은 노발대발 난리를 쳤고, 사장의 어머니까지 와서 ‘왜 그만두냐고?’ 물어보며 ‘힘들더라도 참아달라.’며 나의 의지를 꺾으려 했다.
그때 난 이런 생각을 했다. 가족 앞에서 명예와 체면이 중요하고, 직원들의 ‘생활과 안정’에는 관심 없는 이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을까? 회사의 어려운 사안에는 직원들 대부분을 참아내며, 견디며, 고통을 분담하려 한다. 그러나 사장들은 여전히 고급 세단과 넓은 평수의 집에서 호화롭게 지낸다. 그 어디에도 고통 분담이란 없단 말이다. 그래! 사장도 힘들었을 것이다. 직원들의 급여를 밀릴 때마다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장의 감정과 나의 현실은 같을 수 없다.
회사를 정리하고 길을 잃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고, 자신도 없었으며, 고작 1년 남짓 일한 경력은 다른 회사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었다.
한 달 보름이 지났을까? 사촌 동생의 결혼식을 다녀오고, 가깝게 지내는 후배를 신길에서 만나기로 했다.
신길역 1호선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저 멀리 지팡이를 짚고 있는 아저씨 한 분이 철도 안전망을 두드리며 갈 바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자 아저씨가 먼저 내가 물어본다. “학생! 김포 가는 지하철을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고 아저씨가 계신 곳은 1호선이라며 제 팔을 잡고 따라오시라고 하자 아저씨는 계속 “고맙다.”며 그 마음을 전하신다. 아저씨의 마음이 전해질 때마다 온몸에 벤 고기 냄새와 술 냄새가 아찔할 정도로 풍겨 왔고, 아저씨는 오늘 동생이 장가간 날이라며 기분 좋아서 한잔했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고맙다는 말 뒤에 전해지는 묘한 슬픔은 다름 아닌 장가간 동생에 대해 미안함이었고, 그 미안함 속에 동생에 대한 고마움과 나에 대한 고마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아저씨는 ‘나 같은 사람이 살아도 될까?’라고 자꾸 물어 보셨다. 내 꼬락서니도 형편없는데 감히 대꾸할 수 없었고, 5호선 플랫폼에 전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아저씨를 보내면 닫힌 전철 문 앞에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저씨! 괜찮아요! 동생도 형을 자랑스러워 할 거예요.” 아저씨가 나의 대답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다시 1호선을 향해 올라오는 내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순길아! 너도 괜찮다. 내가 너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If you has one shout, one opportunity. just do something like you can someone help’
내게는 그것이 계시였고, 예언이었으며, 행동 강령이었다.
나의 20대가 그 안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40대가 되었다.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 같으며, 배우고 싶으며, 응석 부리고 싶고, 다가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