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팸 주의 관련] 아! 랜섬웨어.

뭐 그런 저런 날이다. 하루가 길고 어쩔 수 없이 이것 저것 찾아보고, 정리하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라…

블로그를 작성하다 보면 고민거리가 하나, 둘씩 늘어나는 것 같았던 그런 때였다.

그런 날에 김진연 작가님이 메일을 주셨다. 어우 황송해라. 저작권 관련 메일이길래 내가 작성한 포스트 중에 저작권을 침해한 것들이 있었나 긴가 민가(?)

고개를 갸우뚱 할 때 즈음에 첨부된 파일의 압축을 풀었고, 그 안에 랜섬웨어가 있었다.

카톡으로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는 중에 갑자기 나의 MacBook Pro Retina가 엄청난 발열과 굉음과 같은 Pan 소리를 내며 돌기 시작했고…

바탕화면의 몇몇 파일과 이미지들이 보지 못한 파일명으로 바뀌고 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나 싶어 재시동했더니 주로 사용하던 계정에서 로그아웃 되고, 이내 몇몇 파일의 접근이 아예 불가가 되었다.

하필 이런 때에….

뭐 별 수 있나? 돈을 줄 생각은 없으니…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하고 나는 모든 것을 format 해 버렸다. Time Capsule에 있는 백업만 믿고…..

ㅋㅋㅋㅋㅋㅋㅋ 망할 Time Machine 같으니….

무려 7~8 차례나 복구를 시도했으니 약 87%에서 항상 복구를 완료 할 수 없다는 안내와 재시동을 반복하였고, 당장 저녁에는 비행기를 탑승해야 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수동으로 파일 하나 하나를 대조하며 업데이트 하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고 일어나니 내 아이폰 8+의 Touch ID가 깨져 있었고, 내 과실도 아닌데 내 과실로 보험 처리를 했으며, 액정만 교환하는 줄 알았더니 결국 리퍼폰이 돌아왔다. ㅠㅠ

이유는 모르겠고, 설명을 못한다고 하고, 자고 일어나니 깨져있고…. 이런 황당한 일들을 24시간 안에 동시다발로 일어나다 보니… 멘탈은 흔들리고….. 뭐 그런 날이다.

랜섬웨어 스팸 메일 이미지

혹시 이런 메일을 스팸 메일에서 발견하셨다면 첨부파일은 열지 말고 그냥 지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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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some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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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5

간밤의 꿈을 잃어버린 나는 방황하듯 홀로 울부짖는 늑대가 되었다.

현실이 부여한 어깨의 걱정과 근심 그리고 내 배 주위로 둘러싼 염려는 결코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멈추고 싶다.

이 시계를 멈추고 싶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멈추지 않는 수없이 많이 조각난 짧은 찰나의 순간 모두를 부숴버리고 나는 다시 기나긴 꿈속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그러나 멈춰지지 않는다.

아주 잠깐이라도 나의 의지와 바램과 소망이라 불리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오길 바라보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여전히 그 ?몽념에 갇혀 있는 것이다.

도망가고 싶다.

멈추고 싶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내게도 타인에게 넘겨준 배려와 용서 그리고 긍휼의 시선을 베푸는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나를 향한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일까?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부족한 것들 뿐이어서 나는 이 고통의 수레를 벗어나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의 인자하신 손길과 그분의 긍휼을 기다린 지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모른다.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을 하루하루 채워가지만 내가 기대하는 것과 그분의 바램은 너무나 다른 것으로만 보인다.

나는 확실히 갈 길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그 자리에 멈춰서 은혜를 구걸하는 거지가 되어야 할지 선택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나를 둘러싼 이 두려움의 저주를 비껴갈 방법을 모르겠다.

그저 눈물로 내 안에 새겨진 저주의 상처들을 하나하나 닦아 내려갈 뿐이다. 내게 주어진 이 상황과 상처들을 모두 끌어안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인가 보다.

밤은 깊어가고 낮이 밝아 오려 한다.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이지만 지금의 나는 오늘에 대한 기대보다 오늘을 살아낼 방법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나는 살아있으면 싶다. 호흡하는 인간으로…. 그리고 시간 속으로….

20180211

눈을 뜨는 것이 무섭기만 하다.

아침은 새로운 시작이 되지 않고, 두려움의 시작이 된 지 한참은 된 것 같다.

여전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 반복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침의 새로움이 시작이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찌뿌둥한 몸을 움직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같은 시간에 일어나 일정한 형태로 반복하는 행동이나 일들을 본다.

먼저는 비타민을 마시는 것이며, 둘째는 따뜻한 차를 그러고도 잠이 깨지 않으면 진한 커피나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이다.

잠이 덜 깬 나의 정신과는 반대로 아내와 아이는 분주하기만 하다.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기 위해 아내는 식사와 옷 그리고 가방과 필요한 것을 챙기고, 아내도 운동을 위해 여벌 옷과 수업을 위해 필요한 것을 주섬주섬 가방에 넣는다.

이 아침에 홀로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일상을 경험하는 사람이 바로 나란 존재다. 내 시간은 멈춰있다. 그것도 거의 일정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다 공복이 주는 신호 때문에 밥솥을 뒤지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이때부터 부족한 시간과 정서적 불안감 그리고 스스로 부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리저리 바빠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 한숨을 돌리려 하면 아이와 아내가 돌아올 시간이다. 그리고 나의 시간 아니 그러니까 나의 일상은 거기서 멈춰버린다.

무의미하다는 것이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상이 이런 것일까?

알 수 없다. 아둘람 동굴에서 다윗도 그런 기분으로 머물렀을까? 주위에는 온통 도둑과 강도 그리고 나름대로 상처와 울분을 품은 이들을 곁에 두고 그도 이런 일상을 맞이했을까? 그저 몇 장으로 이루어진 책에는 다 나와 있지 않지만, 그 두려움을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다. 그 동굴에서 그는 무슨 꿈을 꿨을까? 어떻게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고, 그 용기를 어떤 방법으로 도둑과 강도들을 설득했을까?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결과를 보자면 그는 그 안에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방법을 배웠고, 그의 능력과 실력이 되어 도둑과 강도 그리고 상처가 가득한 사람들을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데 가장 필요한 인물들로 바꾸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 되었다.

지금 내가 그 소망을 내 맘에 품고 기다리고 있다.

2018.1.29

얼마 전 부터 서버의 상태가 이상했다.

아니 사실 서버는 별 문제 없었다. 몇가지 해야 할 것들 때문에 이것저것 실험 중인데…

실수로  MySQL을 건드린 것이 화근이었다.

적어두었던 Root 계정의 암호는 당최 먹질 않고, 웹사이트에는 계속 접근 불가로 나오고…

그나마 타임머신으로 백업을 해 놓았던 것이 생각나 복원했더니.. 2017년 12월 28일이 마지막 백업이라 몇 개의 데이터는 살릴 수 없었다.

그걸 감사해야 한다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뭐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거의 없었는데 정상이었을 때 작동하지 않았던 PlugIn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걸 보면서 세상에 무조건 손해 볼 일은 없다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

태어났으니 죽는 것이고

시작했으니 끝이나야 하는 것이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계라는 울타리 안에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불편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걱정되고…

그렇지만 또 살아야 한다.

지금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오늘을 사는 것이다.

2017.10.17

그렇게 한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변한 것은 없고 그저 안주해 있다.

생각이 많아지기 보다는 오히려 생각하는 시간을 없애기 위해 멍한 표정으로 창문 밖이나 아보카도를 보거나 그것도 실증이 나면 밖에서 뜀박질하는 것이 일상이다.

지방과 근육양이 비율이 1:1인 이상한 비만인이 되어 가고 있다.

할 일이 산더미 같다고? 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욕구가 산더미 같이 쌓여져 있다.

아침에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아내를 위해 커피를 내리고, 침구를 정리하고, 율이의 어린이 집 등원을 돕고,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제일 잘한다.

무엇일까?

이 허무와 공허의 뫼비우스 띠에 대해서 가르쳐 준 선생이 없다. 아니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 선,후배 또는 아내 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오롯이 내 안에 담아 두고 쌓아서 높이 우러러 봐야 하는 것일까?

여전히 내 인생과 아내 그리고 아들의 인생은 진행 중에 있다. 인생의 나침반이 고장 나지 않았다면 나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것 만큼은 그것 하나만큼은 내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이 쉽지 않다는 것과 신경쓰고 고민해야 할 것 조차 나는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해야 한다. 해 봐야 한다. 넘어지거나 혹은 쓰러지더라도 그래도 가봐야 한다.

그것 만큼은 내가 제일 잘하는 거 아닌가!!!

[Book Review] 위기를 극복한 리더들의 생각을 읽는다.

Think Leader.

상단의 제목 아래 새겨진 영문 제목이었다.

알고 싶었다는 욕구가 더 컸던 것 같다. 이 책을 사 놓고 책장 한켠에서 언젠가는 그들의 입장이나 그들과 같은 위치의 사람이 되면

그들의 견해와 경험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에 읽지 못하고 방치했었다.

결국 3일 만에 책을 다 읽고, 이렇게 흔적을 남기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2009년도 번역된 이 책을 그 때 읽지 않고, 지금 읽는다는 점 외에는 충분한 가치들이 담겨져 있었다.

새로운 원칙이나 학문적 방향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선택과 유형을 놓고 적절한 비유와 나름의 논리를 세워놓은 내용이 흥미롭다.

저자 크리스토퍼 호에닉은 Leader를 6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1. 이노베이터형
  2. 발견자형
  3. 의사소통형
  4. 선도자형
  5. 창조자형
  6. 실행자형.

읽으면서 놀라는건 내가 이 6가지 유형 모두 배우고 내 몸과 생각 안에서 완전히 습득하여 언제든지 꺼내서 사용할 수 있을까?였다.

절대 그럴수없다고 말하면 나를 제한하는 것 같고,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면 마치 교만의 끝판왕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할 수 있으니 그런 생각을 안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책의 마지막 부록까지 모두 읽은 후, 책을 덮으며 나는 어떤 성향의 사람인가?와 어떻게 나를 발견할 것인가?에 고민이 생겼다.

비교와 복제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분명 그 안에 가장 자연스러운 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자기계발 영역에도 유행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유행과 상관없이 내가 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그런 친구다.

위기를 극복한 리더들의 생각을 읽는다

글을 쓰는 이유.

최근 김영하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비슷한 고민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젊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다. 그 분들에게 내가 좋은 사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내 안에 그 사람에 대한 정체 불명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그 형태는 때로는 붉은 색을 담은 힘이며, 보일 듯 말듯 아주 작은 점이기도 하며, 내 생각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의 깊이와 넓이로 나를 흔들고 자극하는 그런 형태이기도 하다.

오늘은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나도 그런 형태의 사람들과 관계에 지쳐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사색을 즐기거나, 좋은 장소에서 기념이 될 만한 무언가를 했다면 내게 더 유익했을텐데 나는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중독되어 있었다.

아니 사람이 그리웠고, 사람 때문에,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전부였던 시절인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내가 느끼며 생각하는 것을 따라 글을 쓴다.

키보드의 둔탁한 소리 뿐만 아니라 글에 집중하는 짧은 순간만큼은 내 안의 나를 바라보며 나에게 가장 정직한 자세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이유?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신과의 우정을 쌓아가는 시간이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 세가지.

제목이 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힘든 일들을 이 세가지로 구분해 보았다.

  1. 태어나는 것.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어머님의 뱃속에서 자라다 보니 10개월을 채우고 태어나야만 했다. 그렇게 때문에 가장 힘든 일이었다 말하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고, 선택할 수 없었으며, 스스로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사는 것.
    이것 참 어렵다. 목적도 없이 태어나 살다보니 해야할 것 투성이다. 경쟁은 왜 이렇게 많이 해야 하며, 이기기 위해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며 내 또래의 아이들 모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수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보이직 않는 닭장 속에서 말이다.

  3. 죽는 것.
    이게 세번째인 이유는 언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선택을 할 수 있다. 그것을 자살이라 부르고, 그것은 1번에 큰 의미를 주신 분들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이기에 논외로 두자. 그래도 3번이 이녀석이란 건 참 다행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가장 어려운 두 가지의 일을 해낼 수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분해 놓고 보니 2번을 감당하고 있는 오늘의 하루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인생을 아직 잘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어떤 선택이 가장 최선이며 올바른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게 사실이다.

열아홉, 스물살에 고민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참 많은 일들을 해냈다. 건강하게 자랐고, 남들은 해 보지 못한 경험들을 해 보았고, 다른 문화와 언어 그리고 완전히 다른 시스템의 공간에서 일도 해 보았다.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음 챕터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늘이라는 하루만 생각해 보면 괜찮은 커피를 마셨고, 아직 배는 고프지 않고, 아침 부터 아들의 재롱에 찰라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으며, 나아갈 삶을 걱정하며 다독여 주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2번이 진행중이니 다가올 3번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지금은 2번에 집중하자. 제일 힘든 일은 지났으니 일단 살아보자.

나는 박쥐다!

포유류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류도 아닌 어둠과 더욱 친해 그 이미지 마저 ‘흡혈’이라는 단어와 제일 잘 어울리는 존재.

“박쥐”

마치 그 존재 처럼 나도 내 삶에서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실패가 두렵다. 사실 실패보다 실패 한 후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없다는 것이 더욱 무서울 뿐이다.

어떤 일을 하다가도 다시 안정적인 일들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나는 나를 거침없이 박쥐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들 보다 과격한 일들을 거침 없이 해 왔다. 믿고, 버려지는 상황 속에서도 내가 가진 믿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생각 그리고 행동으로 살아왔다.

그런 내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어두운 동굴 속 습한 기운에 몸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배트맨처럼 부자나 탁월한 운동력 혹은 매력이라고는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살펴 보면 내 안의 박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매력은 충분하다 생각한다.

누군가는 의아해 한다. 이런 류의 글을 왜 그렇게 쓰는지? 그리고 이 글이 포스팅되고 나를 걱정해 주시는 분들의 전화가 온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면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비슷한 고민과 걱정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조금이라도 내가 느끼고 생각하며, 고민하는 것들을 정리하여 공유한다면 지금 누구가에게는 힘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

나 자신을 위해 쓴 글이기 때문에 내가 제일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계기 같은 것도 되고,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를 느끼는 근원이 될 수도 있다.

그래! 박쥐다. 흡혈 박쥐같이 잔인한 이미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과일 박쥐는 되지 않을까?

눈을 뜨면 반복되는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 Draft 1위의 신인 Rookie가 아닐 수도 있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간신히 찾을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 어둠 속에서 남도 나도 의식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이를 악물고, 오늘이라는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이들이 있기에 삶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어리석고, 멍청하다 손가락질 당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다. 캄캄한 동굴 속에서 어떠한 기대가 생기지 않을 것 같더라도 동굴 입구에서 비추어오는 실낱 같은 짧은 빛을 따라 나아가다 보면 이내 동굴을 떠나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날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까?

어느 것에도 구분되지 않고, 속하지도 않으며, 자유로운 상태의 날것 그대로의 나.

그게 바로 내가 아닐까? 아침부터 박쥐가 살아있다고 발버둥치는 것도 지친다.

율의 성장 일기 1

여전히 내 눈에는 아가같은 율이가 내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주일.

방송실에서 함께 고생하는 지체가 하반신 마비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배가 끝나고 율이와 함께 병원을 방문했다.

중환자실이라 면회가 제한적이라 얼굴만 보고 나와 주차장을 향하는데..

율이가 내게 묻는다.

“아빠! 삼촌 많이 아파요?”

“아빠는 잘 모르겠어. 율이가 아빠랑 같이 기도할까? 삼촌 빨리 병원에서 나올 수 있도록…”

그러자 율이는 눈물을 흘리며 내게 대답한다.

“삼촌이 너무 불쌍해요! 아빠 삼촌 위해서 우리 오늘 꼭 기도해요.”

내 눈에는 아직도 아가 같은데…. 이 아이는 마음과 생각이 벌써 누군가를 걱정할줄 아는 만큼 성장해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과자를 한껏 먹고, 쓰레기를 아빠에게 건네주는 오만방자한 행동을 하지만 행동과 다르게 많이 성장한 것 같아서 뿌듯하기만 하다.

아이는 그 생각과 감정을 한껏 키워가고 있는데 아비인 나의 시간은 멈춰있는 착각 속에 산다. 그래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지만 내 생각과 감정은 지금 보다 더 어린 시절의 아이만 기억하려는 것 같다.

그 제한을 부수는 순간이 율이와 내가 마시지 않는 술이라 하더라도 한잔 받아 놓고 인생을 이야기 할 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더 많은 요즘이다.

[Review]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스포일러 없음-

고민.
말하고 싶지만 들어주는 이 없고, 듣고 싶지만 말하는 이들이 없는 것.

나눈다고 해결되지 않고, 듣는다고 도움이 될 수 없는 것.

그러나 일단 말하고, 나누고,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해결이되고, 도움이 되며,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것.

그렇게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저 믿고 읽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니까…

다른 이들의 서평이나 논평 또는 리뷰를 읽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읽고 싶었고, 그의 세계관에 빠져들고 싶었다. 다행이었을까? 화요일 부터 내 왼쪽 어깨에 문제가 생기고 쉼을 얻게 되었다.

해야 할 것은 산더미인데 한가롭게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단 이틀만에 마지막 페이지 까지 읽을 수 있었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소통의 부재라고 한다. 아니 어찌보면 디지털 소통의 기기는 풍부하고 다양해졌지만 그 안에는 ‘인간미’라는 것이 배제된 기술이 전부라 생각된다.

가까운 곳에 사는 지인들과 식사 한번 하기 힘들고, 오랜만에 모인 명절에는 듣기 싫은 이야기만 하기 때문에 일방적인 전달에 의한 일종의 대화 폭력이 소통을 막는 원인이 아닐까?

소설이란 장르를 빌려 기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알게되는 순간이다. 그런 사람이 있고, 장소가 있고, 이야기가 있는 곳.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더라도 내 안의 고민을 말할 수 있는 곳.

사회의 성장과 함께 억울함을 들어주는 이들은 없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외치던 어린 시절 뉴스로 보았던 그 사람의 외침이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바뀌어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 현실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말할 수 없는 이들의 그 고요한 외침에 얼마나 나는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책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그런 곳이 필요하다고 그 필요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그와 더불어 어린 시절 삼삼오오 빈집에 모여 장래 희망을 이야기 하던 친구들과 동네 어귀에서 한껏 소리지르며 뛰놀 수 있었던 그 시절에만 허락된 일상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고민은 내 안에 있다. 그래도 해결의 방법 또한 내 안에 있을 본다.

나의 사소함을 하나님이 주목하고 계실까?

나병인.

흔희 그들은 문둥병자라 불리며,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 할 수 없으며 가장 극심한 차별을 겪어야만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저 여기 있어도 죽을 수 밖에 없고, 그 곳에 가도 죽을 수 밖에 없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이었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도 아니고, 선지자로 부터 예언을 들은 것도 아니며, 신비하고 초월적인 어떤 존재의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살고 싶다. 그러나 그들이 죽인다면 죽겠다는 것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4명의 문둥병자. 그들은 그렇게 성경에 기록되고, 예언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귀하게 사용된다.

열왕기하 7장 3절~10절에 기록된 그들은 살고 싶었을 뿐이다.

나의 갈등은 언제나 바닥과 최고의 높이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런 모습이다.

마치 진자의 추처럼 양극단의 끝을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거기 그대로 일상의 사소함을 주목하는 존재가 계시다는 것이다.

나의 사소한 일상이 그렇게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삶일지도 모른다.

내 사는 일생의 날 중에 단 하루라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배우고 싶은 것들에 대하여.. Part 1.

  1. 불혹의 나이라 한다.

이 시기에 무언가 배운다고 결정하면 ‘누군가는 어리석다.’ 어떤 이는 ‘부양할 가족들은?’이런 걱정과 의문에 가득한 질문들을 받곤 한다.

나의 20대는 내 인생의 후반이 없는 것처럼 선교단체에 헌신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내 삶을 이끌어갈지 고민하지 않은 채 ‘나의 부르심이 그곳에 있었다.’고 착각할 만큼 극단적인 결정을 했던 시절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도 내 안에 가득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나의 반응이었고, 그 결정에 대해서 만큼은 후회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나니 내 행동에 후회보다는 내 또래의 비슷한 사람들과의 행보에 대한 부러움이 가득한 시절이기도 했다. 부모가 내어주는 등록금으로 학교에 다니고, 직업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러다 방향이 잡히지 않으면 쉽게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그런 친구들 말이다. 이상하게 내 주변에는 그런 친구들이 유독 많았는데 하나님은 그 때부터 남과 비교하는 인생으로 살지 않도록 나를 훈련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부러운 시절에 나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친구가 다니는 회사에 입사했다. 스피커를 조립하고, 조율하고, 포장하고, 배달하고…. 때로는 꽉 막힌 사장의 자랑을 귀가 막힐 정도로 듣고 또 들어야만 했다. 경기 불황이란 이유로 함께 일하던 친구들도 하나, 둘씩 회사를 그만두고 마지막까지 남은 나는 다른 대안이 생길 때까지 참아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 인내에 종지부를 찍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추석 휴가비’였다.

사장은 경기가 좋지 않고, 힘드니까 서로 이겨내자며 나를 다독였고, 나는 그 말을 찰떡같이 믿었다. 긴 연휴가 끝나고 연휴 동안 있었던 일을 커피 믹스의 설탕이 녹아 들어가듯 나누고 있는데 사장이 조카들에게 나눠준 용돈을 이야기했고, 기가 막히게 기억력이 좋은 나는 그 말에 힘드니까 이겨내자는 사장의 말은 휴가비를 주지 않기 위한 술수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을 더 고민하던 중에 사장은 또 경기가 좋지 않아 급여를 정확한 날짜에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때가 내 기억에는 이미 2달이 밀린 상태였는데 또 지급되지 않는 현실에 낙담할 수 밖에 없었다. 함께 일하던 김 주임은 추석 그 사건이 있었던 이후로 무단결근으로 나오지 않았고, 결국에는 사직하게 되었다. 사직하는 순간에도 사장은 밀린 임금이나 다른 처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환송회 없이 그렇게 퇴사를 종료했다.

김 주임이 퇴사한 직후 사장은 내게 ‘경기가 좋아지면 급여를 올려줄 테니 그때까지 참아보자.’고 했다. 그러나 경기가 좋아져도 내 급여가 오를 것이라는 확신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사장의 미국 지인으로부터 배송된 새로운 장비들이 들어 오고 있었고, 나는 내 급여가 저런 곳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퇴사 의지를 전달했을 때, 사장은 노발대발 난리를 쳤고, 사장의 어머니까지 와서 ‘왜 그만두냐고?’ 물어보며 ‘힘들더라도 참아달라.’며 나의 의지를 꺾으려 했다.

그때 난 이런 생각을 했다. 가족 앞에서 명예와 체면이 중요하고, 직원들의 ‘생활과 안정’에는 관심 없는 이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을까? 회사의 어려운 사안에는 직원들 대부분을 참아내며, 견디며, 고통을 분담하려 한다. 그러나 사장들은 여전히 고급 세단과 넓은 평수의 집에서 호화롭게 지낸다. 그 어디에도 고통 분담이란 없단 말이다. 그래! 사장도 힘들었을 것이다. 직원들의 급여를 밀릴 때마다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장의 감정과 나의 현실은 같을 수 없다.

회사를 정리하고 길을 잃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고, 자신도 없었으며, 고작 1년 남짓 일한 경력은 다른 회사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었다.

한 달 보름이 지났을까? 사촌 동생의 결혼식을 다녀오고, 가깝게 지내는 후배를 신길에서 만나기로 했다.

신길역 1호선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저 멀리 지팡이를 짚고 있는 아저씨 한 분이 철도 안전망을 두드리며 갈 바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자 아저씨가 먼저 내가 물어본다. “학생! 김포 가는 지하철을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고 아저씨가 계신 곳은 1호선이라며 제 팔을 잡고 따라오시라고 하자 아저씨는 계속 “고맙다.”며 그 마음을 전하신다. 아저씨의 마음이 전해질 때마다 온몸에 벤 고기 냄새와 술 냄새가 아찔할 정도로 풍겨 왔고, 아저씨는 오늘 동생이 장가간 날이라며 기분 좋아서 한잔했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고맙다는 말 뒤에 전해지는 묘한 슬픔은 다름 아닌 장가간 동생에 대해 미안함이었고, 그 미안함 속에 동생에 대한 고마움과 나에 대한 고마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아저씨는 ‘나 같은 사람이 살아도 될까?’라고 자꾸 물어 보셨다. 내 꼬락서니도 형편없는데 감히 대꾸할 수 없었고, 5호선 플랫폼에 전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아저씨를 보내면 닫힌 전철 문 앞에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저씨! 괜찮아요! 동생도 형을 자랑스러워 할 거예요.” 아저씨가 나의 대답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다시 1호선을 향해 올라오는 내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순길아! 너도 괜찮다. 내가 너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If you has one shout, one opportunity. just do something like you can someone help’

내게는 그것이 계시였고, 예언이었으며, 행동 강령이었다.

나의 20대가 그 안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40대가 되었다.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 같으며, 배우고 싶으며, 응석 부리고 싶고, 다가가고 싶다.

여름 휴가 2.

한낮의 무더위에 지치고, 밤에는 폭염으로 늘어지는 요즘이다.

아이에게는 날씨가 의미 없고, 그저 해가 뜨고, 진 것으로 자신의 할 일과 놀이를 탐구하는 것이 전부인 요즘이다.

양평 처가에서 장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율이가 엄마에게 말한다.

“다음에는 큰 삼촌, 작은 삼촌, 숙모 형아, 누나들 모두 할머니 집에서 사진 찍었으면 좋겠다.”고…

아들의 마음에 점점 작아지는 이유는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아이의 입으로 먼저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른으로서 어른다운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내내 율이는 고모와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는다. 율이의 방학 일주일은 그렇게 웃어른들과 시간을 보내는 그런 날이 되었다.

양평 처가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시는 장모님을 따라 산책을 나가는 율.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를 살뜰하게 챙기는 모습에서 아내는 여러번 울컥 했다고 한다.
아이의 인성을 어떻게 키울지 고민을 많이 했다. 여러가지 활동을 시켜 볼까도 했지만 아내와 내가 선택한 것을 몸소 실천하는 것. 아내와 나는 한달에 많게는 10번 이상씩 본가를 다녀가고, 한국에 귀국하고 격주마다 양평을 내려 오기도 했다. 그저 찾아뵙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을 뿐인데 아이는 부모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내 자식 하나만 잘 키우면 될까? 내가 자라던 시절에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들로 산으로 다녔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자신의 집에 화장실이 몇 개인지? 또는 친구의 집이 몇 평인가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한다. 부모의 영향이겠지… 싶다가도 덜컹 율이도 그럴까?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을 다 잡는 것이 일이 되었다.

설빙에서 3

아내와 가까운 교회 집사님이 보내주신 쿠폰. 율이는 “까페가요?”를 반복하며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 한다. 이 날 뿐만 아니라 차를 타면 “할머니 집에 가요?”, “고모한테 가요?”, “우리 어디가요?”로 자신의 궁금한 것들을 표현하려 한다.

설빙에서 2

설빙에서 1

입추(立秋)가 지났으니 볕은 따갑고, 바람은 선선해 지겠지? 벼는 점점 누런 머리를 들어내며 익어갈 것이고, 우리 집 하천 어귀에는 코스모스와 잠자리가 날아다닐 때가 오겠지. 여름 휴가가 끝났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뜬구름 잡듯 둥둥 떠다니고 있다. 생각을 바로 잡아 굳건히 해야할 지금. 나는 여전히 양평의 그늘에서 돗자리를 깔고 잠을 자고 있는 것 같기만 하다.

여유에 대해서

삶에서 행복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남부럽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만족의 최고점에 이르러 남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순간일까?

아들이 1주일 동안 아펐다. 아내는 매일 오후에 잡혀있는 레슨 스케줄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나와 율이 단 둘이서 함께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었다.

첫 날은 카봇 동영상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단기간 동안에만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일 뿐 좋은 선택은 될 수 없었다.

간간히 산책을 나가더라도 율이 안에 있는 무한한 에너지를 만족시키거나 채울 수 없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무작정 가보자였다.

레슨이 끝난 아내를 차에 태우고, 정처 없이 친구가 권해 준 곳으로 운전을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율이가 잠들면 모든 계획을 망치는 것이기에 신나는 카봇 주제곡으로 흥을 돋우고, 아내는 쉬지않고 율이의 흥에 장단을 맞춘다.

도착한 곳은 경인 여객터미널.

휑한 곳에 배와 물이 어우러져 있고, 인적이 드물어 율이가 뛰며, 소리지르기에는 적합한 것 같았다.

24층 전망대에 올라 탁트인 공간을 보며, 안도의 한쉼을 내쉬고, 전망대에서 내려와 갈매기를 구경할 때 센스가 넘치는 아내는 근처 편의점에서 율이가 마실 음료와 새우깡 하나를 가방에 넣어서 나온다.

새우깡을 꺼내는 순간. 모든 갈매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고, 나는 그 많은 새우깡 중에 하나를 꺼내 이 사진을 찍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율이는 떠날 때 보다 더 들뜬 목소리로 갈매기에게 새우깡 준 이야기를 쉬지 않고 말하다 잠이 들었고, 아내는 내게 고생했다는 수고의 말을 전한다.

다른 아빠들처럼 가지고 싶은 것을 많이 사주는 아빠도 아니고, 남들 처럼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살수 있도록 경제적 여유를 제공하는 아빠도 아니건만…

아들의 모습에서 괜한 걱정과 미안한 마음은 없고, 고맙고, 행복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잠들기 전 엄마에게 “율이 오늘 행복해요.”라며 말하는 아들.

내게는 인생이 복잡한데 아들의 행복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의 불안함을 넘어서는 그것은…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것들의 회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여전히 불안하고 두렵다. 그러나 아들을 보며 다시금 자세를 바로 잡아 본다.

“행복은 의외로 단순하다.”

새우깡 먹는 갈매기